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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성』 탐구
하나님과의 친밀한 연합의 삶을 위한 데레사의 가르침
루쓰 버로우스 저
오방식 역



만약 내가 성공적으로 목적한 바를 이룬다면, 이 책은 두 가지 특징을 갖게 될 것이다.


이 책은 데레사가 쓴 『영혼의 성』에 관한 해설서가 될 것이며, 독자가 『영혼의 성』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다가 이 책에 눈을 돌리면 그 책의 모든 중요한 점들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한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만약 이 책이 그 고전을 올바르게 설명한다면, 이 책은 그 자체로 하나님과의 연합(일치)의 삶으로 인도하는 유용한 안내서가 될 것이다.



비록 어느 독자에게 데레사의 글이 매력을 주지 못하고 당혹스럽게 하며 혹은 ‘의욕을 잃게’ 만들더라도, 사려 깊은 독자라면 성녀 데레사의 글을 읽고 감동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데레사의 글은 진정성으로 울려 퍼진다. 데레사는 확실히 알고 있는knows 사람이다.

그녀는 단순히 사색하고 추론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이 말해왔던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기 안에 살아있는 지식의 샘을 가졌고, 항상 그 샘으로부터 물을 긷는다. 그녀의 완전한 확신은 우리를 압도한다. (그리고 우리의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 가지고 있는 불가피한 감정의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과 바울과 요한이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는 인간의 궁극적 운명에 관해 말하고자 애썼던 것,

즉 영Spirit이신 그분과 한 영one spirit이 되는 것이 심지어 이생에서 생생한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고 확신했다.


그녀에게 그것은 더 이상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부름 받는 문제가 아니며,

우리가 그것에 이르는 여정 가운데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미 일어난 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강력하고 변화시키는 진리로 그녀에게 들어온 것이다.

그녀는 이것이 우리가 이 땅에 머무는 동안 소수에게만 알려지는 진리라고 말한다.


십자가의 요한도 이와 같이 말했다.

데레사는 자신이 소수에게만 알려진 살아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이 지식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지식은 이론적으로는 결코 알 수 없으며, 자기 자신 안으로 들어가서 거기에서 살 때에만 알 수 있는 인간 존재에 관한 전혀 다른 차원의 지식이다.

그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며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지혜로 이끄는 길 위에 발을 굳게 내디딜 수 있다.

- 그밖에 다른 인생의 목적이 있을까? - 그렇지만 우리를 눈멀게 하는 인간의 교만 때문에 그 길은 분명하게 알 수는 없는 길이 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취향에 맞지 않고 우리와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또한 우리가 우리의 성미에 더 잘 맞고 십중팔구 덜 도전적인 사람에게 돌아서는 것을 완전히 정당하게 느끼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삶과 죽음의 문제인 진리,

즉 인간 존재의 진리에 대한 증언자들을 내쫓을 수는 없다.

삶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증언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데레사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삶이 성숙해져가는 과정을 보며 분석하고 묘사할 수 있는 능력을 받은 사람은 많지 않다.

그 진리는 인간 경험의 특별한 현실을 가지고 있으며,

특별한 사상의 분위기와 문학적 형식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그것들의 표현 방법과 씨름하면서 해야 할 우리의 의무는 때로는 애매하고 심지어 오해할 여지가 있는 것에서 빛나는 근본 진리를 뽑아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나는 데레사의 가르침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확신했고, 어느 누구도 더 위대한 지식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랫동안 그녀를 이해하고 배우기를 노력해왔다

(물론 가르멜회의 수녀로서 우리 수도회의 카리스마를 구현한 그녀에 관해 상세히 연구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극복해야 할 어려움들이 있었다.


한 가지를 들자면, 비록 이제는 그녀를 더 이해하기 때문에 내 취향에 잘 맞는다는 것을 알지만,

요즘 표현대로 하자면,

그녀는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수도회에 있는 형제자매처럼 나도 그녀에게 경외심을 가졌고, 우리의 ‘거룩한seraphic 어머니’로서 그녀가 한 모든 말씀은 거의 모두 영감을 받았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여러 흥미로운 일화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그녀의 가르침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왔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특히『영혼의 성』이 그러하였다.

그녀가 그 책을 쓸 때는 황홀경ecstasy 속에 있는 것처럼 보였으며, 그녀도 자신이 쓴 것은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가끔씩 그녀가 실수를 했으며 자신의 말을 명확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항상 일관성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무모한 행동일 것이다! 그녀가 사용했던 지적, 신학적, 문학적 도구가 그녀가 전달하고자 했던 것을 소통하는 데에 자주 불충분했고 어설펐다는 의문을 어느 누가 감히 제기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거룩한 어머니를 우리와 똑같이 부족하고 만족스럽지 못한 평범한 세상으로 떨어뜨리는 것일 수 있다. 나는 오래 전의 일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아마 이 책을 읽는 현대의 독자라면 방금 한 말을 듣고 웃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에게 충분히 현실적인 어려움이었기 때문에 극복해야 했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이듯이 그분은 나에게도 해답이었다. ‘종이 주인보다 더 위대할 수 없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 상황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그것은 역사를 받아들이는 것인데, 우리 각자는 역사 안에 있으므로 그분이 그러셨듯이 우리도 시대, 사상의 분위기, 편견 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셨는데, 왜 데레사는 천사seraph가 되어야 하는가? 그녀도 단연코 ‘우리는 천사가 아니고 인간일 뿐’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내면의 지식은 심지어 예수님 자신이 하신 가능한 모든 표현마저 초월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것일까? 그분은 자신의 죽음과 함께 세상의 종말이 곧 오게 될 것을 기대했던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께서 자신 안에서 활동하고 계신다는 것과 자신을 통해 놀라운 일을 하고 계신다는 것을 생생하게 인식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의 종말은 아직도 오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틀리신 것일까?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가장 심오한 의미로는 절대 틀리지 않으셨다. 그분의 통찰은 하나님의 깊이, 즉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시는 깊이와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의 깊이에서 나온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조차도 완전히 알 수 없으며 인간의 관념으로 온전히 해석해 낼 수 없는 깊이에서 말씀하셨다. 필요에 의하여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때에는 분명히 불충분한 이미지와 생각의 패턴 그리고 그 시대의 기대의 한계 안에 있었다. 이것은 그분의 인간으로서의 현실the reality of his humanness의 일부였다.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그분의 인간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분께서 알고 계셨던 것what he knew은 완전한 진리utter truth였다. 그분께서 말씀하신 것도 가장 깊은 의미에서 완전한 진리였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 속에서 세상이 종말을 고했다는 것보다 더 큰 진실이 어디 있겠는가? 이 세상의 질서는 무너지고 흩어졌으며 새로운 질서가 도래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 나라가 전복될 때에 힘을 가지게 된다. 우리가 그와 같은 심오한 실재를 다룰 때에는 집단적 관점에서 생각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는 각 개인에게 임하는 한도 안에서 오게 된다.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나라는 오지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있는 낡은 세상을 전복시켜야 한다. 그 나라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출산의 진통 속에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옛 것에 대해 죽어야 한다. 진정 세상의 종말은 이미 온 것이다.



각 개인의 마음 안에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 즉 큰 지진, 부활절 사건에 있었던 이 세상 질서의 전복이 데레사가 가르친 전부이다. 그것이 그녀와 십자가의 요한이 말한 초자연적 기도 혹은 신비기도supernatural or mystical prayer가 의미하는 바라고 한다면 진부할지도 모르겠다. 하나의 피조물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심오한 것을 설명하기에는 그 용어들은 상투적이고 기술적이며 조잡한 단어일 것이다.
각 개인의 마음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의미하며 완전히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일이 일어날 때, 우리의 세상, 즉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우리의 물질적 존재에 속박된 ‘육’의 세상은 종말을 맞는다.



여기에서 나는 돌 하나로 두 마리의 새를 잡으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독자들이 이 책으로 인해 겁먹지 않고 비판적으로, 그렇지만 최고의 존중을 담아 데레사의 글을 연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현대적인 용어로 해석할 수 있도록 준비시킨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책의 주제를 처음부터 알리는 것인데, 데레사가 말하고 있는 바가 바로 예수님의 계시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우리 존재의 가장 심오한 실재이다.
이 해설서의 내용은, 겨울동안 매 주일 저녁마다 가르멜회 자매들이 『영혼의 성』의 궁방들을 탐구하려는 나의 시도를 듣기 위해 기꺼이 와주었을 때 만들어진 것이다. 그들의 반응은 나의 기운을 북돋아주었다. 생각들은 계속해서 수정되었는데, 그 중 일부는 이 주제를 전혀 낯설어하는 젊은 청중들을 위해 새롭게 표현되었다. 나의 공동체에게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이 책을 바친다. 그들은 오랜 세월동안 함께 한 동료이자 친구들이다. 그리고 새로 들어 온 분들도 있는데 이들도 마찬가지로 소중한 분들이다. 데레사 서거 400주년을 경축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나의 가르멜 수도회 형제자매들에게도 이것을 바친다. 또한 그 밖의 많은 분들께도 감사를 전한다. 그들은 나와 교제를 나누면서 나의 통찰들을 깊고 명확하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들이다. 그분들께도 역시 애정을 담아 이 책을 바친다.



데레사는 나의 이러한 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실까? 내가 확신하는 바는, 그녀가 자신의 궁방에 대한 끊임없는 나의 호기심과 탐구를 즐거워할 것이라는 점이다. ‘당신이 매우 엄격하게 수도원에 틀어 박혀 있었고, 오락을 즐길 기회가 없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내가 생각하기에 내면의 성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당신에게는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윗사람으로부터 허락을 받지 않아도 어느 때든지 그 안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녀는 자신의 딸들이 사랑 안에서 대범하고 기꺼이 위험을 무릅쓰며 바보처럼 보이는 것을 겁내지 않기를 원하셨다. 장점과 단점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 책은 사랑으로부터 나왔다. 나는 그녀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리라고 생각한다. ‘내 딸아, 너는 확실히 훌륭한 시도를 했단다!’


저자의 서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