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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르보의 베르나르의 아가서 설교 제4권

 

내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제4권

설교 67-86

 

 

설교 67 선재적 은총과 뒤따르는 은총
설교 68 신랑과 신부 상호간의 보살핌
설교 69 영혼을 찾아오시는 아버지와 아들
설교 70 백합화로 비유되는 진리
설교 71 백합화의 향기와 밝음
설교 72 영적인 낮과 그림자
설교 73 베데르 산의 노루와 어린 사슴
설교 74 노루와 어린 사슴
설교 75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
설교 76 거리와 큰 길에서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노라

설교 77 진리를 향한 사랑
설교 78 하나님의 예정, 창조, 영감
설교 79 사랑의 유대
설교 80 말씀과 영혼
설교 81 말씀을 닮은 영혼
설교 82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모양
설교 83 부의 사랑
설교 84 하나님을 사모하는 영혼
설교 85 영혼이 말씀을 찾는 일곱 가지 이유
설교 86 신부의 겸손

 

선재적 은총과 뒤따르는 은총


말은 듣기에 감미롭고, 감정을 즐겁게 해주고, 풍부한 의미와 심오한 신비를 지니고 있어 정신을 부요하게 해줍니다. 영은 분발하여 활동하는 동안에도 두려움이 가득하며, 지식에 의해 부풀어 오른 교만이 기적적으로 치유됩니다(고전 8:1). 그러나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겉핥기식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여 지나치게 탐구에 몰두하는 사람은 자신의 지적 능력이 승리하여 정신이 완전히 정복됨을 발견할 것입니다(고후 10:5). 그는 신부의 말을 듣고 겸손해져서“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시 139:6)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녀의 첫마디는 매우 다정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아 2:16). 그 말은 단순하지만 사랑스럽게 들립니다.


2. 신부는 사랑으로 시작하여 신랑에 대해 말하면서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 외에 다른 것을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고전 2:2). 그녀가 누구에 대해서 말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만, 누구에게 말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 장면에 신랑이 등장하지 않으므로, 그녀가 신랑에게 말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녀가“내 사랑하는 자야 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돌아와서”(아 2:17)라고 말하므로, 이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확실합니다. 신랑이 말을 마친 후에 늘 하던 대로 다시 떠나갔지만 그녀는 항상 자신과 함께 있다고 여기는 신랑에 대해 계속 말하고 있다고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즉 신랑은 여전히 그녀의 입술 위에 있고, 그녀의 마음에서 떠난 적이 없으며,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녀가 입으로 하는 말은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녀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합니다(눅 6:45; 마 15:18). 사랑받고 있는 신부는 자신이 사랑하는 자에 대해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많이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눅 7:47).

이제 우리는 그녀가 누구에 대해 말하는지 알았으므로, 누구에게 말하는지 알고자 합니다. 그녀가 하녀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해야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올 수 있습니다. 신랑이 떠나있는 동안 하녀들은 안주인을 떠날 수 없
기 때문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라는 말이 갑작스럽고 앞뒤가 맞지 않으며 대화의 주된 목적인 바 듣는 사람에게 지식을 전해주기에 부족하므로, 나는 신부가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혼잣말을 하고 있다고 여기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은 듣는 사람에게 정보를 전달하지 않지만 관심을 일으킵니다.


3.“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그녀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합니다(요 16:18). 거룩한 영혼이여, 당신의 사랑하는 자는 당신에게 어떤 존재이며, 당신은 그분에게 어떤 존재입니까? 이 친밀한 관계, 서로 주고받는 이 약속은 어떤 것입니까? 그분은 당신의 것이며, 당신은 그분의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당신을 소중히 여기는 만큼, 당신도 그분을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까? 아니면 어느 정도 차이가 있습니까? 당신의 느낌을 분명히 말해 주십시오(요 10:24). 얼마 동안 우리로 하여금 기대하게 하렵니까? 그것이 당신만의 비밀입니까? 그렇게 말한 주체는 지성이 아닌 정서(affectus)이며, 그것은 지성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말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랫동안 기다렸던 신랑의 말을 듣고서 신부가 크게 기뻐했고, 그 말이 끝났을 때에 침묵할 수 없고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는 것이 이유입니다. 그녀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느낌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그저 침묵을 깬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우리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지만(눅 6:45) 항상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정서는 나름의 표현 수단이 있으며, 의지를 거역하더라도 그 수단을 통해 자신을 드러냅니다. 두려움은 떨림으로 표현되고, 슬픔은 괴로움의 신음으로 표현되며, 사랑은 즐거운 외침으로 표현됩니다. 사랑하는 자를 잃은 사람의 비탄의 소리, 슬퍼하는 사람의 흐느낌, 고통당하는 사람의 한숨, 두려움에 질린 사람의 갑작스런 비명, 배부른 사람의 하품 등은 습관적인 것입니까? 그것들이 사리에 맞는 이성적인 담화, 신중한 발언, 계획적인 연설의 구성요소입니까? 그러한 감정의 표현들은 정신적인 과정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임의적인 충동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그러므로 억제할 수 없이 강하고 뜨거운 사랑, 특히 하나님 사랑은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고 인식하지 않는 한 사용하는 단어들의 수효, 어순, 문법, 흐름 등을 고려하기 위해 멈추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사모하는 갈망만 으로 만족하기 때문에 말이나 표현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사랑으로 타오르고 있는 신랑은 신부가 경험하고 있는 사랑의 불을 조금 식게 하려는 의도로 그녀의 말이나 발언 방식에 신경을 쓰지 않지만, 사랑의 강권을 받고 있는 신부는 분명히 말하지 않고 되는 대로 말합니다. 신부는 그처럼 마음이 상쾌하고 만족한 상태에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